'머무는 것도 산책이 될 수 있을까?' 시인, 오은

미션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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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좋아하는 사람, 오은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첫 문장은 늘 비슷하다. 사는 동네, 혹은 하고 있는 일과 직책. 다른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때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개를 보았다. 산책을 좋아한다. 아니, 얼마나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소개부터 이러한가 싶었는데, 목차를 넘겨보니 산책에 관한 시도 보인다. 그는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등의 시집을 낸 오은이다. 올해로 시를 쓴 지 20년이 넘은 오은은 한때 빅데이터를 다루는 회사원이었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다. 시기에 따라, 그리고 장소에 따라 직업은 달라졌지만, 늘 두 가지는 오은 곁을 함께했다. 그건 시와 산책이다. 

에디터 김기수 포토그래퍼 박은비



아마 오은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에게서 ‘시인'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란 어느 직업이나 으레 갖고 있는 정형화된 견해, 즉 편견을 말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로 세상을 관조하고, 은은한 미소와 살짝 예민한 말투를 가진 사람. 물론 오은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나 방송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안다. 오은이 얼마나 유쾌한 사람인지. 양재천 주변에서 만난 그는 아주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내가 처음 만난 시인이자, 가장 명랑한 인터뷰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예전에는 읽기보다는 쓰기가 먼저, 듣기보다는 말하기가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내 안으로 흡수된 것들이 글이나 말로 나오는 거더라고요. 읽은 게 없었다면 쓰지도 못했겠구나 깨닫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로 이전에는 말하고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는 사람이었다면, ‘책읽아웃'이라는 팟캐스트를 오래 진행하면서 점차 듣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있어요. 순서가 바뀌었죠.” 


그가 시 쓰는 사람이 된 지는 올해로 20년이 넘었다. 물론 20년 동안 시만 써온 건 아니다. “저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 같아요.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은 공대의 특성이 담긴 문화기술대학원을 나왔어요. 다른 전공 학생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유연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졸업하고 4년 정도 빅데이터 회사에 다녔는데, 제가 했던 일은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의뢰가 들어온 제품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거였어요. 데이터 안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찾아서 발굴하고 전달하는 일이었죠. 시 쓰거나 산책할 때도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인데, 온라인상에서의 관찰을 했던 셈이에요. 일은 재밌었는데, 아무래도 문학과는 조금 떨어진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때 주말마다 어떻게든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써낸 시집이 지금 앞에 있는 <유에서 유>입니다. 시집이 나온 다음에는 사직서를 냈고, 문화 기획 사업을 해보기도 하고 대학에서 문화 콘텐츠를 가르치기도 했어요. 지금은 프리랜서로 방송이나 강연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고요.”


한가로운 태도는 아니었지만, 여러 분야를 기웃거리는 오은의 모습은 왠지 플라뇌르flaneur를 떠오르게 했다. 플라뇌르는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 혹은 거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오은이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아이디 역시 그 단어에 자신의 성을 붙인 ‘flaneuroh’다. “보통 시인들은 아이디 만들 때 poem, poetry 이런 걸 많이 쓰잖아요. 그게 왠지 싫어가지고(웃음). 플라뇌르는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게으름뱅이나 놈팡이처럼 좋지 않은 뜻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느슨한 상황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명할 때 종종 쓰는 멘트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틈을 내세요. 그 틈으로 빛살이 들이칠 수 있게.’ 우리가 틈날 때 하는 건 취미예요. 틈을 내서 하는 게 진짜죠. 저에겐 두 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산책하는 것과 시 쓰는 일.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했던, 그 두 개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싶어요. 물론 일이 많아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제나 플라뇌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어요. 나의 삶을 스스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 여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일상을 원하는 그림으로 연출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늘 필요 이상의 불편한 장면을 만들어 내니까. 오은 역시 산책자가 되기 전에는 그랬다. “산책은 목적이 없어요. ‘나는 산책을 열심히 해서 최고의 산책가가 될 거야!’ 하시는 분은 없잖아요(웃음). 발길 가는 대로 걷는 무목적 행위에서 무용한 시간이 귀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릴 때부터 ‘너 그거 해서 뭐 하려고 그러니'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니까, 이제는 쉴 수 있는 하루가 주어져도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이렇게 가만히 시간을 보내도 되나? 강박감에 그 시간을 자꾸 무언가로 채우기만 했죠. 저는 산책을 하면서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지게 됐어요. 쓸모없는 생각도 하고요. 가치와 필요성을 계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제가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 산책이었나 싶기도 해요.


요즈음 그가 하는 산책이 여유로운 미소에 가깝다면, 처음은 어딘가 긴장되고 상기한 얼굴에 가까웠다. 가만히 있으면 머릿속으로 자꾸만 시름이 차오르던 시기였다. 그는 걸어야만 했다. “2018년에 친한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항암 치료를 받다가 뇌경색으로 입원하셨고, 황현산 문학 평론가, 허수경 시인 등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통을 앓았죠. 그런데 질병은 제가 걱정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냥 걸었어요. 힘든지도 모르고 5km, 10km... 서울 시내를 온통 걸어 다녔죠. 처음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가, 어느 경계를 넘어서면 머리가 새하얘져요. 마치 디스크 조각 모음, 휴지통 비우기를 한 것처럼요. 몸은 기진맥진했지만, 마음은 가뿐했죠.” 오은의 상기된 표정을 다시 여유롭게 보듬어준 건 아버지였다. “저희 아버지가 정말 건강한 분이었어요. 젊을 때 기계체조 선수를 해서 그런지, 같이 목욕탕에 가면 50대 후반에도 복근이 있었죠. 그런데 항암 치료는 사람을 정말 아프게 하더라고요. 성인들은 무리 없이 걷는 근린공원을 아버지는 한 바퀴 돌려면 6~7번을 쉬어야 했어요. 덕분에 산책하면서 머무는 걸 배웠죠. 이전까지는 걷는 것만이 산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는 것도 산책이더라고요. 아버지가 또 식물 이름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서 ‘은아, 저거 이름 뭔지 아냐'고 물어보면서 비비추나 칠엽수 같은 식물도 알려주시고.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동안 공원에 못 갔어요.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벤치가 너무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일부러 더 먼 곳에 있는 공원을 찾아다니다가 1년 정도 지나서야 다시 그 주변을 걸었어요. 사실 그때 아버지와 함께했던 산책이 안 좋은 기억이 아니잖아요. 함께 보폭을 맞춰 걸으면서 대화도 많이 나눴고요. 지나고 보면 제 걷기 인생에서도 2막을 열어준 것 같아요. 혼자만 익숙했다면,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도 큰 부담 없이 할 수 있게 됐거든요.”


산책하며 가뿐해진 마음의 공간에는 다른 것들이 꼬물꼬물 기어와 자리를 채웠다. “산책하며 비운 자리는 그 상태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무언가로 채워졌어요. 그건 제가 바라본 풍경일 수도 있고, 지나가는 아이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간판일 수도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여행보다 산책을 좋아하는데요. 여행이 시야를 넓혀주고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 말은 일상에서 쉽게 하던 것들을 제약받는다는 것이기도 해요. 물론 그 제약 때문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고 하지만, 저는 굳이 그럴 거면 여기에서 일상을 잘 살아갈래, 라는 입장인 거죠(웃음). 그리고 제가 호기심도 많지만, 겁도 많아요. 낯선 곳에서, 특히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다가오면 크게 당황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을 최소화하면서도, 저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게 산책인 것 같아요.” 산책으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오감이 늘 관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은 익숙함 뒤에 가려진 다양한 모습을 내비쳤다. 


“일상이라는 단어 안에는 진부하다거나, 천편일률적이라는 속성도 있어요. 하지만 세상의 어떤 부분은 보고 싶은 사람, 무언가를 보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만 보여요. 제가 지금 이 동네에 4년 살았거든요. 그런데도 처음 발견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동네에 카센터가 있다는 것도 올해 초에 알았어요. 매일 지나던 길인데도 관심이 없으니까 몰랐던 거죠. 같은 길도 조금씩 변해요. 벽보가 새로 붙었다거나, 가게의 메뉴가 바뀌었다거나. 사장님이 낡고 흐릿해진 글씨를 지우고 새로 적었을 장면을 상상하면 너무 귀엽지 않나요? 저는 그냥 그런 게 재밌어요. 혹시 의류 수거함은 무슨 색인지 아세요?” 질문을 받고 기억 속에 있는 동네의 풍경을 헤집어봤지만, 어디에도 의류 수거함은 보이지 않았다. “의류 수거함은 보통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요. 골목 사이나, 전봇대 옆에 있으니까 잘 보지 않게 되죠. 사실 동네마다 달라요. 우리 동네는 노란색이에요. 이름은 뭔지 아세요? 옷체통. 너무 예쁘죠(웃음). 이걸 발견한 날에 정말 행복했어요. 옷체통이래, 옷체통! 제가 이걸로 시를 쓸 수는 없겠지만, 이런 관찰이 모이고 모여서 글을 쓰는 거 아닐까요?”


산책하면서 관찰한 것들은 오은의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록은 대부분 사진이 아닌 글이다. “기억이라는 게 얄팍해요. 물론 요즘 스마트폰은 시간과 장소까지 저장되지만, 그 사진 속에 내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까지 담기진 않잖아요. 당시에는 중요하다고 촬영한 사진도, 먼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의미 없이 보이곤 하죠. 저는 사진이 말해주지 않는 부분,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공간을 찾았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저장해요.” 사진보다는 글로 저장하는 걸 좋아하는 오은이지만, 어쩔 수 없이 셔터가 가닿는 순간도 있다. 그는 우리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산책하면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에요. 낮에 걸을 때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 이걸 볕뉘라고 부른대요.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런 뜻이에요.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그늘진 곳에 비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누가 모른다고 무시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너무 예쁘지 않아요?” 오은의 시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언어유희다. 그에겐 놀이에 가까운 일인데, 그 재료는 단어다. 볕뉘처럼 새로운 어휘가 등장할 때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단어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 더 잦다. “저는 어떤 단어든 나만의 정의를 내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예전에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시를 썼어요. 산책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라고 나오거든요. 근데 제가 생각하는 산책은 그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휴식을 위해서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건강을 위해서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라고 적었죠. 그냥 걸었다는 걸 구구절절하게 쓴 거예요(웃음). 저한테 산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취미이자, 나 자신에게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는 일 같아요. 중학생 때 배운 자아정체성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선명해지거든요. 저는 산책을 그렇게 정의하고 싶어요.”


맛있는 음식을 들으면 괜히 입맛을 다지고, 여행 에피소드를 들으면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산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 자꾸만 몸이 들썩였다. 자리를 정리하고 오은과 함께 양재천 주변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표정과 보폭으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오은은 이 동네가 산책하기 좋다고 웃으며 이곳저곳에 담긴 귀여움을 알려주기도 했다. 문득 궁금했다. 그는 언제까지 산책을 하게 될까. “몸이 많이 쇠약해지지 않는 한 계속하지 않을까요? 굳이 틈을 내서 하진 않더라도 틈나는대로 할 것 같아요. 우리가 계획표에 물 마시고 샤워하는 것까지 적진 않잖아요. 저에겐 산책도 비슷해요. 자연스러운 삶의 루틴이 된 거죠.” 십여 분 정도 더 걷다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스케줄이 있다는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바로 지하철역으로 가려다 마음을 바꿔 조금 더 걸었다.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이 단순한 행동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으니까. 아니, 오은의 말처럼 굳이 걷지 않아도 때론 벤치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산책할 수 있다. 눈에 띄는 벤치에 앉아 오늘의 대화를 곱씹으며 여기저기로 시야를 옮겼다. 목을 뒤로 조금 젖히자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과 햇볕이 보였다. 볕뉘였다. 나도 카메라를 들어 그 단어를 사진에 담았다.




* 본 기사는 컨셉진 93호 '당신은 산책을 하고 있나요?' 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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