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로 모두를 주목시킬 수 있을까?' TBWA코리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유병욱

미션캠프
조회수 569


TBWA코리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유병욱


기사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진 이런 과정을 거친다. 우선 초고를 마치고,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원고를 완성한다. 그럼 다시 맨 앞으로 되돌아간다. 제목을 달 시간이다.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을 나열해 본 다음 몇 개를 조합해 제목을 적는다.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다. 음, 썩 어울리는 제목이 아니다. 대체로 처음 쓴 제목은 탈락. 최종 제목은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며 몇 번의 되감기를 거친 후에 정해진다. 그렇게 쓰인 제목 아래로는 본문이 이어진다. 하지만 만약 한 줄로 모든 걸 말해야 한다면? 한 줄, 길어야 몇 줄로 끝나는 광고 카피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아파트 광고 속 ‘진심이 짓는다’는 문장처럼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우는 한 줄이 써지는 과정이 궁금했다. 그 문장을 쓴 당사자를 만나기 위해 TBWA코리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유병욱을 찾아갔다. 직함부터 ‘창의적’이라는 단어가 붙는 그에겐 되감기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역시 한 줄을 위해 여러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완성된 문장은 한순간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에디터 송은호 포토그래퍼 황지현



내 안에 든 걸 탈탈 털어내 기사를 마무리한 날, 뭐라도 채워 넣기 위해 찾은 서점에서 <평소의 발견>이라는 제목을 보고 책을 펼쳤다. ‘진심이 짓는다’,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 ‘세상에 없던 신발’. 읽으면 브랜드 이름이 저절로 떠오르는 문장을 쓴 사람이 작가라기에 그 책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문장들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건, 한 업계에서 20년 가까운 시간을 쌓았다는 점이었다. 


“2002년에 카피라이터로 일을 시작했고, 6년 전부터는 CD가 되어 일하고 있어요. CD는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로 이뤄진 팀을 이끌면서 광고 제작 과정에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브랜드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대해 팀원과 의견을 모아서 카피를 쓰고, 거기에 맞는 그림들을 발상해서 광고주를 만나서 설득하죠. 그다음에는 촬영을 진행할 스텝을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해요.” 내 안에서는 이렇다. 광고 하면 왠지 창의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카피라이터는 왠지 버퍼링 없이 문장을 써 내려갈 것 같다. 왠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광고 하나를 만드는데 2주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 하나에 2주의 시간이 온전히 다 주어지진 않아요. 한 팀이 동시에 여러 개를 맡으니까 일이 계속 쌓이거든요.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일하기보단 쳐내야 하는 일이 생기죠. 그래서 순발력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을 수밖에 없긴 해요.”


앞에 ‘왠지’가 붙는 말들은 대개 선입견이다. 광고와 카피라이터에 대한 생각도 그랬다. 순발력이 필요한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글을 잘 쓰는 천재적인 카피라이터는 별로 없어요. 처음엔 잘해도 정체되는 사람도 많고요. 오히려 조금 느리더라도 문장을 파고 들고, 많이 써보는 친구들이 결국 잘하더라고요. 근본적으로는 지적호기심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호기심이 있으면 뭔가를 자꾸 흡수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잖아요. 그리고 자기만의 생각의 각도가 있어야 해요. 흡수한 것에 깊이 있는 생각이 더해져야 자신만의 문장이 나오거든요.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한 문장에도 이전에 흡수한 순간이 들어있다. 창의력이란 IQ처럼 타고나는 건 줄 알았는데,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무수한 순간들이 모인다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를 늘 하고 싶어요. 저도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문장도 되게 별로였고요. 근데 잘하는 줄 알았어요(웃음). 그래서 초반에 상처를 덜 받은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쓴 카피는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별로예요. 점점 단련을 통해 나아갔거든요. 사실 100명 중에 천재는 두 세명뿐이지만 나머지 98명에서도 천재처럼 잘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선 지적호기심과 끈기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자기 일에 대한 자존도 필요하겠죠. 내가 내 일을 사랑하면 더 잘하고 싶으니까요.


19년이라는 시간을 쌓는 동안 순간은 쌓였다가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쌓은 것들을 꺼내서 쓰고 나면, 다시 텅 빈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짜도 짜도 생각이 안 나와서 스스로가 치약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때 제일 좋은 건 멈추는 거더라고요. 되게 어려운 일이긴 한데, 탈탈 털려서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가장 필요한 건 사무실에 앉아있지 않는 거예요. 집에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해서 그 시간을 단절시켜요. 오늘은 멈추고 시간의 방식을 바꿔요. 회의를 할 때도 아이디어가 잘 안 나오고 답이 없다고 해서 늦게까지 남자고 하는 게 아니라 팀원들에게 시간을 줘요. ‘어떻게든 되겠지, 괜찮아’ 하고 그 다음날로 미루고 그때까지 알아서 시간을 쓰라고 해요. 몰아세우지 않고 새로운 뇌로 다시 일할 때 훨씬 결과물이 좋았거든요. 저랑 같이 일했던 팀원들도 나중에 저와 헤어질 때, 제일 좋았다는 얘기가 ‘어떻게든 되겠지’래요(웃음).” 


그의 말을 들어보니 순간은 곧 영감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영감이 있을 때, 어떤 순간이 내 안에 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은 영감이 모여 커다란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예전에 저의 스승이신 박웅현 CCO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대단한 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내가 있는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맞더라고요. 정말 좋은 것들이 제 주위에도 있었어요. 옛날엔 런던 같은 도시가 멋있지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울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산이 있고, 어디에나 시간이 쌓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고 보면 어디에든 영감의 덩어리들은 다 쌓여있는 것 같아요.”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줄곧 있었으나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찾았다. ‘평소’를 발견했다. “오늘 인터뷰로 이렇게 만난 일도 영감이죠. 사람만큼 거대한 영감은 없잖아요. 세계가 통째로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이렇게 영감은 누구한테나 지나가고 오는 건데, 그걸 특히 잘 발견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고 무슨 책을 읽는지, 무슨 음악을 듣는지, 어디를 갔는지를 쭉 눈여겨봐요. 그리고 나도 가보고 그 노래 들어보고 하면서 쌓아나가는 것 같아요.” 그런 그의 평소는 어떤 모습일까. 


“평소를 어떻게 보내냐고 물어보는 후배들이 있어요. 멋있게 답해야 할 것 같은데(웃음) 딱히 그런 게 없어요. 주말이랑 평일 저녁에는 아이랑 시간을 보내야 해서 온전히 저를 위해 쓸 수 있는 날은 드물거든요. 저한테 주어진 좋은 시간은 출퇴근하는 시간이, 업무 중에 비는 시간. 이렇게 밖에 없어요.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더 잘 쓰려고 노력해요. 사회적 지위가 생기다 보니 주차장 자리도 나왔는데(웃음) 일부러 운전 안 하고 지하철 타고 다녀요. 그때 넷플릭스를 보고, 음악도 듣고 하죠.” 평소의 뜻이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인 것처럼, 그에게도 대단한 평소는 없다. 하지만 평소를 특별한 것으로 바꾸는 방법은 있었다. 


“영감은 다 지나가잖아요. 지금 이 시간도 지나가고 있고요. 이걸 내 걸로 만들려면 잡아 두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영감을 어떻게든 잡아두는 행위는 무조건 도움 돼요. 그리고 문장을 쓰는 카피라이터 입장에서는 영감을 얻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써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서 앉아서 쓰는 시간도 가져야죠.” 


영감이 곧 결과물이 되는 일을 하기에, 어떤 평소를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물도 달라진다. 그래서 그의 평소에서는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 “항상 감각을 세우고 있는 게 피곤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오로지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라면 되게 피곤할 것 같아요. 만약에 ‘나는 마케터니까 일을 잘하기 위해서 인풋을 넣어야 돼’ 하고 강박처럼 책을 읽는다면 일에 도움은 되겠지만 힘들겠죠. 적정선은 스스로 세워야 할 것 같아요. 내가 행복한 정도의 선에서 집어넣어야죠. 견딜 수 있는 정도로 하는 건 저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반경이 늘어나더라고요. 그래도 음악 들을 힘도 없을 만큼 힘든 날도 있어요. 소리조차 고통스러운 거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도 정말 필요해요.”


하지만 영감은 결과물이 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그의 삶을 즐겁게 했다. “출근이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일상 속에 영감이 있으면 출근길은 덜 괴롭고 퇴근길은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랬거든요.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것들을 생각하며 출근하면 덜 괴롭고 퇴근할 땐 더 좋았어요.” 그는 조금 더 좋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보내면서, 출근과 퇴근 사이의 시간에는 더 좋은 결과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광고의 목적은 문제 해결이지만 물건만 판다고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이로운 메시지 결이 있거든요. 무조건 착한 광고를 만들자는 게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경쟁자를 깎아내리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고급스러운 위트와 어떤 집단을 상처 주지 않는 방법도 있을 테고요.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이왕이면 그쪽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희처럼 메시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더 예민하게 자기를 정돈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안테나가 오염되어 있으면 안 좋은 생각이 더 많이 퍼질 테니까요.” 


앞서 그가 말한 대로, 나에게도 오늘의 만남은 하나의 영감이 되었다. 그 만남이 인터뷰라서, 영감을 이렇게 원고로 적어 붙잡아 둘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내가 붙잡은 영감이 당신에게도 영감이 된다면 더 좋겠다. 좋은 생각은 널리 퍼질수록 좋은 법이니까. 


그 역시도 그러하길 바랄 거다. “지금까지 선배들이 ‘저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멋있었어요. 이제 저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요. 광고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들도 많지만, 저는 이 일이 가치 있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에 자존을 가지고 일하면 좋겠어요. 근데 말뿐만이 아니라 그걸 보여줘야 하는 거잖아요. 저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나사처럼 쓰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하면서도 일은 계속해서 잘 굴러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죠. 스스로를 정돈하기 위해서도 노력하면서요.”




* 카피라이팅 캠프를 통해 유병욱 CD님의 카피라이터 훈련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컨셉진 81호 '당신의 삶엔 영감이 있나요?' 편에서 발췌했습니다.







7 0